염상섭의 <전화>


염상섭은 서울 종로구의 토박이 중인층으로 태어나 두 차례의 일본 유학을 거치고 독립운동으로 검거된 적도 있으며,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쟁과 분단, 그리고 4·19혁명까지를 살아낸 작가였다. 그가 거의 모든 조선의 문인들이 겪었던 일제 말기의 혹독한 현실을 만주에 가서 살며 피해갈 수 있었던 것이나, 동시대의 좌익 사회주의 문예운동에 거리를 두었다거나 하는 사실들은 어쩌면 지엽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염상섭은 3·1운동이 자기 문학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만세전>은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 동경에서 시작하여 경성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통하여 당시 조선 백성들의 삶을 냉정하고 꼼꼼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역설적으로 어째서 이듬해에 거대한 분노가 전국을 휩쓸게 될 것인지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의 초기 단편인 ‘전화’는 얼핏 보면 범작으로 보이는데 전화를 들여놓게 된 경성 유산계급의 일상을 그려내고 있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명품’을 주제로도 엇비슷한 이야기를 꾸며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을 발표한 1925년은 앞뒤로 관동대지진에서의 조선인 대학살과 만주에서 독립군의 치열한 전투와 의열단의 테러활동, 조선공산당 운동이 시작되던 무렵이고, 이듬해에 6·10만세 사건이 일어나는 등 식민지의 사회 모순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던 때였다. 염상섭은 나중에 나타날 채만식과 더불어 냉정하고 침착한 생활 묘사를 통하여 부정적인 현실이 드러남으로써 풍자적인 효과를 보이는 식으로 검열을 피해 간 듯하다. 염상섭의 거의 모든 작품마다 돈에 대한 구구한 설명과 치밀한 계산을 하고 있는데, 소설이란 결국은 세속의 산물임을 주장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화란 개발독재 시대였던 1970년대까지도 특권의 상징이었던 셈인데 1920년대의 식민지 조선에서라면 더욱 그러했을 터이다.

전화라는 문명의 이기를 추첨을 통하여 ‘매어놓게’ 된 사업가의 집에 고작 처음 걸려온 전화가 기생의 것이며, 부부싸움으로 소설의 첫 장면이 시작된다. 결국은 전화라는 이 새로운 물건을 누릴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상태로 생활이 엉망으로 헝클어지며 남에게 되팔아 넘기고 약간의 시세 차익을 얻는 것으로 소설이 끝나면서 주인공의 아내는 “어떻게 전화 하나 또 놓을 수 없느냐”고 중얼거린다. 식민지 부르주아가 누리는 풍족한 일상이라고 해봤자 이렇듯 시시껄렁하기만 하다. 염상섭은 우울한 시선으로 찍은 퇴색한 사진 몇 장을 늘어놓음으로써 식민지 조선의 풍경을 우스꽝스럽게 재현해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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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이주사는 전화 추첨에 뽑혀 아내의 옷과 패물 등을 전당포에 잡히고 300원에 전화를 놓았다. 아내는 이틀 동안이나 애타게 첫 번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렇게 기대했던 전화는 아침 일찍 기생 채홍이가 남편을 찾는 젼화였으므로 아내는 몹시 기분이 상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회사에 출근한 이 주사는 채홍이로부터 전화를 받고 기분이 밝아져 퇴근길에 방문했으나, 채홍이는 약속이 있다며 아쉬운 듯 밤에 들러 줄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이주사는 아침에 전화로 인한 아내의 심술을 생각하며 셔츠와 장갑을 선물로 사 가지고 돌아와 아내의 마음을 돌린다. 아내와 함께 저녁 시갓를 하던 이주사는 직장 동료인 김주사의 전화를 받고 채홍이를 생각하며 외출을 한다. 그 동안에 아내는 채홍이가 남편을 찾는 전화를 받았고, 남편으로부터 채홍에 대한 문의 전화를 받는다. 아내는 마음이 상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늦게야 귀가한 이주사에게 전화의 쓰임이 건전하지 못함을 불평하며 못마땅해 한다.

이주사는 아내를 달래며 전화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것을 제의한다. 마침 이 이야기를 들은 김주사는 자신의 아버지가 전화를 오백 원에 살 것이라 말한다. 이 주사는 이 돈으로 전당포에 잡힌 아내의 옷을 찾고, 본집과 기생 기화에게 김장을 마련해 준 후 나머지 돈을 용돈으로 쓸 생각에 흡족해 한다.

그러나 김주사는 부친에게 칠백 원에 전화를 샀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백 원을 가로챈다. 그리고 이주사를 속이고 몰래 사귀어 온 채홍이와 즐기며 새 양복을 맞추어 입는다. 이 사실을 안 이주사의 아내는 김주사 부자를 찾아가 이백 원을 돌려 받고 좋아한다. 전화를 놓은 지 며칠 사이에 사백 원이나 번 것이다. 아내는 이주사에게 전화를 다시 놓을 것을 은근히 권한다.